주저함.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지를 못하고 있다. 글감이 자꾸 떠오르고 논리의 흐름이 이어짐을 내가 통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본다면 이는 필시 욕망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외부적 요인의 통제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학기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180cm에 달하는 키에도 불구하고 60kg에서 5kg나 더 빠져버렸다는 수치적 사실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매주 넘치는 숙제, 논문, 퀴즈, 시험, 발표도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경험한 순간 그 문제는 인간 일반으로 확장되며 나를 괴롭게 하였다.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고 그 중 몇몇은 나에게 적절한 설명력을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사안은 '확장' 개념에 기반한 일반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만의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내 인식체계 내에서는 뚜렷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불편하게 한구석에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학기는 무사히 끝났다. 어떤 과목은 over-qualified되기도 하였고, 어떤 과목은 기대 이하의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교수와는 학문적으로, 때로는 인간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분명 타인은 나의 객관적 성과에 대해서 나름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완벽주의적 기질은 나 자신의 평가가 아닌 타인의 평가에도 수긍하지 않는 무의미한 고집을 부리게 만든다.

위기는 기회이자 도약의 계기라고 했던가. 제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할 당시에 수학과 물리학 등의 다양한 분야가 혁신적으로 성과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분명 사실이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내가 이번 학기에 느꼈던 어려움만큼이나 나 자신이 성장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근래에는 미시경제이론을 수강하며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 교수님이 creative한 덕분에 흥미로운 수업이 되고 있다. 무의미한 압박이 없고 지적 고무감을 충만하게끔 하는 수업이다. 취미 아닌 취미로 MIT Opencourse의 다양한 동영상 강의 중에서 Differential Equation을 느긋하게 보고 있다. 물론 음악 감상이나 미술관 방문은 기회가 닿는대로 하고 있다. 몸무게가 원래의 수치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도달한 점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고요함과 평온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사고의 분열적 확장을 체계화하지 못하는 것인지 검토해보았지만 아니었다.

두려움과 무의미함이다. 현실적 제약과 압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행위가 나에게 누적되고 축적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행위를 시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블로그의 글들은 단지 일회적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에(물론 그런 글쓰기가 타당하다.) 나의 지적 '자본'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나의 글쓰기는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무의미한'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매우 제한된 의미를 점점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확장시키는 나 자신이다.

지난 학기는 글을 쓰는 작업이 많았기 때문에 글쓰기에 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글쓰기 패턴이 블로그에서 구사하기에는 훼손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학교에서 글쓰기를 배운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글이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나의 생각이 온전히 반영되고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든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불편함이 느껴진다. 느끼지 못했던.

어째서 글쓰기를 하면서 이러한 느낌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좋은 느낌에 고양되기를 원해 글쓰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나의 글쓰기의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마음이 온전히 정리된 가운데 편한 마음으로 쓰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중단되어야 한다.

by Amnesiac | 2009/07/18 01:31 | About M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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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누구게 at 2009/07/18 03:25
메신저에서의 말투와 블로그에서의 말투가 사뭇 다르시군요.
블로그에서도 글을 좀 보고 싶은데. 중단되어야 합니까?
Commented by Amnesiac at 2009/07/19 01:50
누구게/ 아마도 메신저에서의 말투가 아닌 당신에게의 말투가 다른 것이 아닐까요?ㅋ
Commented by 유한요조 at 2009/07/19 01:27
안타깝네
Commented at 2009/07/19 21: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mnesiac at 2009/07/20 12:14
stapelia/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상대에 대해 '맞춤형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덜 귀찮아지기 때문이겠죠. 한편으로 나 자신의 가치관을 훼손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회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힘이 중요한 것이고, 이는 곧 '권력'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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